전체 15곳의 유적 중에 사찰은 황룡사지, 분황사지, 인왕동 사지, 천관사지, 사천왕사지, 미탄사지 등 6곳이 선정되었으며, 원지 유적은 월지와 구황동 원지 유적 등 2곳이 선정돼 사찰과 원지 유적이 복원정비 사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본보는 구황동 원지 유적이 과연 어떤 원지이었는지를 고찰하여 그 공간적 의미를 살펴보고 사찰과 원지가 사상적으로 어떤 의미가 있으며, 그 유적에서 출토된 유물을 통해 생활사적 의미도 찾아본다. 참고로 경주시 문화재과의 도움을 받아 2021년 학술대회 ‘신라왕경의 사찰과 정원’이라는 책자에서 인용하고 신라문화유산연구원의 자문을 받았다.
<신라 왕경의 중심부에 위치>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실시한 황룡사지 전시관 건립부지 유적 발굴에서 신라시대의 세번째 원지가 발견됐는데 바로 구황동 원지 유적이다. 이 원지 유적은 연못과 부속시설 등으로 구성된 원지 영역, 7개의 구역으로 세분되는 건물지 영역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시기적으로 원지 유적를 비롯한 중요 유구의 편년은 고신라 말기부터 통일신라시대에 해당하는 7~10세기에 걸쳐 있다. 구황동 원지 유적은 분황사 동쪽의 북천 남안에 접해 있으며, 황룡사와 분황사 등과 더불어 신라 왕경의 중심부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수혈식(위에서 밑으로 주검을 넣도록 되어 있는 무덤 양식)으로 조성된 7세기대 육각형 건물지와 청동기시대의 주거지 등은 그 잔존상태가 비교적 양호하지만 초석 건물지 등의 유구는 결실이 심하다.
축대의 방형 돌출부에는 연못을 조망할 수 있는 누정형 건물이 건립됐으나, 대부분의 유구는 결실되고 2기의 나무를 심은 흔적이 남아있을 정도라고 한다.
<대홍수 후 경덕왕 14년 다시 조성> 구황동 원지 유적에서 핵심적 구성요소인 연못은 남북 길이 46.3m, 동서너비 26.1m, 호안석축 길이 192m, 면적 1,049㎡(317평)에 달하며, 안압지의 약 1/15에 해당하는 규모이다. 연못 내부에는 2개의 인공섬을 장축 방향으로 나란히 배치했으나 축조 방법은 다르다고 한다.
발굴조사보고서에서 구황동 원지 유적을 분황사와 관련이 있는 東池(동지)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았다. 선덕여왕 3년(634)에 분황사가 창건된 이후에 분황사 동쪽에는 동지가 조성됐다. 이후 효소왕 7년(698)부터 경덕왕 14년(755) 사이의 어느 해에 북천이 범람해 동지의 대부분이 유실 또는 매몰됐다는 것이다.
그 시기를 더 좁히면, 효소왕 7년(698) 또는 성덕왕 2년(703) 신라왕경에 대홍수에 의해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다고 보았다.
경덕왕 14년(755)에는 분황사에 대형 약사동상을 주성했으며, 이를 안치하기 위한 대형 금당도 함께 중창했을 때 새로운 조영계획에 의해 연못, 축대 등이 폐허화됐던 동지를 다시 조성했는데, 늦어도 원성왕대인 8세기 후엽에는 완료되었을 것으로 보았다.
<분황사와 연관성 적어...궁궐 동쪽의 원지> 동지를 처음으로 조성한 시기는 분황사 창건 연대를 상회하지 않는 7세기에 해당하며, 출토유물의 중심연대인 8세기에는 북천의 범람으로 유실되었던 연못과 축대 등을 새로운 형식으로 개축했으나 통일신라와 그 운명을 같이 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분황사의 동쪽에서 발견됐던 구황동 원지를 분황사와 관련, 분황사의 동지라고 파악했으나 유구와 석축의 존재 상황을 볼 때 분황사와 관련시키는 것이 문제가 있으며, 분황사는 통일신라 이후에도 존재했으나 원지 유적은 그 이후 존재가 사라지게 되므로 연관성이 없다는 견해가 제시됐다.
그러면 분황사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데 참고한 『삼국유사』의 ‘원성대왕’ 조의 사료에 따르면 청지와 동지에 사는 용의 부인들이 원성왕에게 와서 자기들의 남편들인 두용과 분황사 우물에 사는 용을 구해 달라고 해서 왕이 구해주었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동지의 용과 청지의 용 및 분황사 우물의 용은 각각의 독립적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에 동지가 분황사와 상관이 있는 것이라면 분황사의 동지라고 표현을 했을 것이고, 분황사의 주지가 와서 구해달라고 하는 것이 일리가 있으며 동지와 청지에 사는 용의 아내가 궁궐의 내정(內庭, 임금이 사적인 생활을 하는 궁궐의 내부)에 와서 원성왕에게 직접 아뢰었다는 것으로 보아 동지와 청지가 왕궁과 관련된 곳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동지는 궁궐의 동쪽에 있는 원지라고 하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첨해왕 7년(253) 4월에 용이 궁궐의 동지에 나타났다는 것으로 보아 궁궐에 동지가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금성의 남쪽에 누워있던 나무가 스스로 일어났다는 것은 상서로운 일의 징조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용이 동지에 나타났으나 불길한 징조를 보이기도 했다.
『삼국유사』의 ‘賢瑜伽 海華嚴(현유가 해화엄))’조를 보면 월성에 동지가 있었다는 것이 확실하다.
발굴조사보고서를 보면 7세기 중후반에 처음으로 조영됐다가 수해로 인해 8세기 중반에 다시 축조됐다고 하므로 처음에는 청연궁을 조영했다가 다시 축조하면서 신청연궁으로 부르게 되고 인원을 추가해 배치한 것으로 해석해 볼 수 있는 것이다.
<북천과 알천의 중간 지점 위치> 『삼국유사』의 ‘신라시조 혁거세왕’조를 보면 혁거세를 목욕시켰던 곳을 동천이라 하고 일연은 주석에서 동천사는 사뇌야(詞腦野)의 북쪽에 있었다고 주기했다. 종래 동천사는 종래 북천에 있었던 것으로 보아 왔는데 최근에 선덕여왕릉과 사천왕사가 있는 남쪽이 낭산으로 알천과 인접한 동천이 있었던 곳이라고 추정한 견해가 있다.
그런데 구황동 원지 유적은 북천과 알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 것이다. 사중기(寺中記)에 진평왕대에 세웠다고 하지만 그에 대한 다른 기록이 없어서 주석으로만 처리했는데 동해의 용이 왕래했다고 하므로 동쪽에 있었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고 하겠다.
월성의 남쪽을 흐르는 남천, 왕경의 서쪽에 흐르는 서천, 왕경의 북쪽에 흐르는 북천 이외에 동쪽을 흐르는 동천에서 천상제를 지냈을 가능성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흔히들 북천을 알천이라고도 하고, 동천이라고도 하는데 신라시대에는 북천의 흐름이 지금과는 달랐다고 보고 있으며 심지어 알천 양산촌의 알천은 낭산쪽에서 흐르는 것으로 보고 있다.
그리고 북천이 범람하면 그 물길이 분황사와 황룡사까지 밀려 들어왔다고 하며, 그래서 구황동 원지 유적도 8세기에 유실돼 새로이 원지를 조성했다. 신라가 멸망하고 나서 허물어졌다가 그 주변에 고려시대에 동천사라는 절이 들어서게 됐다는 주장도 있다. <저작권자 ⓒ 드림저널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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